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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사진비평상-창작상 심사 총평》

탈락은 영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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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공든 작업물을 심사라는 이름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살펴보는 일은 즐거운 일일까.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낱장의 뭉치를 요모조모 뜯어보고 생산자의 말을 비교적 소상히 듣는다는 건 호사를 누리는 일이 아닐 수 없으니까. 그런데도 즐겁지만은 않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진다. 불현듯 도마 위에 올라간 나를 발견한다. 너에게 묻던 말을 나에게 되돌린다. 지금 나는 어떠한가. 나의 작업은 어떠한가. 무엇을 채우려 애쓰고, 무엇을 비우지 못해 힘겨운가. 가벼웠던 마음이 달아나고, 무거운 마음은 무서운 마음이 된다. 그 두려움 탓에 나는 이런 ‘부담스러운 일’을 기피해 왔다. 심사받는 기분으로 심사하는 자라니, 이 무슨 부조리극인가.

 

  23회를 맞는 사진비평상에 마흔두 명이 작업을 보내왔다. 많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막 출발선에 선 새내기가 아니라 이미 달리고 있는 ‘선수’라는 걸 감안하면 적은 수도 아니다. 선수들은 길을 떠났고, 이미 달리는 중이다. 각자의 집을 지어봤고, 그걸 고치거나 허물어 다시 짓거나 또 다른 집을 지어가는 중이다. 작건 크건, 화려하건 소박하건, 이들은 집을 알고, 작업이라는 집을 꿈틀대는 생물로 만들려 한다. 물론, 노련한 선수들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노련함이란 말에는 살짝 노회함이라는 느낌이 묻어 있으니까. 노련한 작업엔 분명 미덕이 있지만, 작업의 미덕이 곧 노련함일 수는 없으니까. 각자의 작업을 보내온 마흔두 명의 선수들은 신진은 아니지만, ‘기성’이라는 틀에 가두기엔 푸르름이 아까운, 그 어떤 의미에서도 경계인일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경계인은 괴롭다, 불안하다. 하지만 경계인이기에 느낄 수 있는, 경계인만 뜰 수 있는 (예민하고 아슬아슬한, 그것도 다 때가 있는) 실눈을 가진다. ‘상’이라는 요란법석 위에 누가 오르고 누가 내려가건 그 실눈을 뜨라고, 섣불리 감지 말라고, 할 수만 있다면 오래도록 버리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너무 크게 떠서도 안 되고, 너무 작게 감아버려서도 안 되는 그 실눈을. 서른다섯 살 이하라는 이 상의 자격요건은 대단히 부당하고, 어떤 작업자와 창작물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빈약한 근거만을 던져주지만, 그 아슬아슬한 경계의 실눈을 보듬고 싶은 취지가 이 민망한 자격요건을 유지토록 한 건 아닌가 막연히 짐작한다.

 

  본심의 심사위원은 세 명이었다. 그 심사에 오른 작업은 다섯 묶음이었다. 마흔두 묶음의 작업에서 다섯 묶음을 추린 건 사진비평상의 운영위원들이다. 따라서 내가 마흔두 작업의 경향성에 대해 말한다는 건 온당치 않고 불가능하다. 내가 마주한 건 전솔지, 이재균, 박규민, 김현석, 김이현의 작업이다. 그 가운데 ‘우리’는 이재균과 김현석의 작업을 골랐다. 내가 받은 심사표엔 독창성에 30점, 발전가능성에 30점, 완성도에 30점, 발표방식에 10점을 매기라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그런 배점 따위를 우습게 여기면서도, 기분에 따른 판정을 경계하려고 또박또박 숫자를 매겼다. 우스운 얘기지만, 점수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굵어봤자 실과 같은 차이였다.

 

  이재균의 <우리는 폭탄의 의미를 끊임없이>는 한반도의 히로시마라고도 불리는 합천의 원폭피해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3자의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끌어들이며 당사자의 시선을 아우르고 있다. 장면 안에 적극 개입하면서 ‘변화된 장면’을 추구했던 이전의 작업과는 달리 관찰자의 자세를 유지하려 했다. 다재다능함이 도드라진다는 게 오히려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걱정이었다면, 그저 기우일까. ‘고통’에 능숙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고통이 빚어낸 장면을 담는 작업은 예외인가. 서툴러선 안 된다는 조바심, 능숙해야 한다는 강박을 조금 덜어내도 좋겠다고 ‘우리’는 입을 모았다. 능숙함은 뻔한 데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니까.

 

  김현석의 <랜더링>은 도시를 담는다. 서울이라는 ‘핵’이 아니어서 애매한 외곽도시 과천을 담았다. 애매함이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 모호함에 빠졌기에 밤낮을 섞어가며 과천의 풍경을 담으려 쏘다녔을 것이다. 과천만의 것이라고 부를 수도 없지만, 과천의 것임에 틀림없는 낱낱의 풍경들에 (흔히 하듯) 모호한 제목과 숫자를 붙이지 않고 낱낱의 이름을 붙이려 애쓴 점도 흥미로웠다. 나무랄 데 없이 세련된 시선과 포착인데, 그것을 ‘김현석에서 우러나온 시선’이라고 부를 만한가 하는 점에선 의문이 남았다. 더 오를 언덕이 보이고, 시간을 두고 그렇게 할 것만 같다는 기대가 김현석의 작업을 고르게 했다.

 

  다섯 명의 작업을 읽고 마흔두 명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면 나는 사진 아닌 것에 대해 먼저 말하고 싶다. 선문답 같은 작업노트를 읽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느꼈다. 우리 모두가 모호함을 핵심적인 정체성으로 지닌 가련한 인간일지라도, 작업의 이유와 과정을 담은 노트마저 그래야 하나. ‘왜’와 ‘어떻게’를 비평가라는 타인이 세련된 문체로 써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는 흔치도 않고, 아직은 아니다.

 언젠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자면, “작업노트는 작업의 부산물일 뿐만 아니라, 작업 그 자체이기도 하다.... ‘왜’와 ‘어떻게’만 솔직하게 담아도 작업자의 노트는 읽고 싶은 글이 된다.”

 우리가 비록 사진에 목을 맨 사람들일지라도, 작업을 이루는 요소가 사진만일 수는 없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 많은 장면들 속에 어쩌면 이토록 사람이 없을까 하는 의문도 남았다. 사람의 등장 여부가 ‘이것이 사람에 관한 작업인가 아닌가’를 판별할 기준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을 모조리 배제하면서 사람과 사회와 세계에 대해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반복되는 장면 속 사람의 부재는 마치 강박적인 노력의 결과처럼 보였다. 사진에서 사람은, 밉다 해도 좋다 해도 버리기 아까운 존재다.

 

  상이라는 응원은, 허약한 인간사의 기반 위에 있다. 23년 세월의 사진비평상과 수상자들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상이란 대단한 응원임에 틀림없지만, 작업을 이어가는 결정타도 핵심도 아니었다. 어떤 이는 상을 받고도 서서히 작업을 접었고, 어떤 이는 상이란 응원 없이도 끝내 작업을 붙들고 있지 않은가. 비수상은 탈락인가, 그런 탈락은 영구한가.

 

  세상사 살다보면 결국 남는 게 친구라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작업이야말로 오래도록 곁에 남는 친구가 아닌지. 내가 내 작업의 의미를 다 알지 못하고, 작업 또한 내 속을 낱낱이 알 수 없다 해도. 내가 작업을 놓지 않는 한, 작업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

 

 고로 나는 수상자만 응원하고 싶지 않다. 절치부심 전전긍긍 와신상담, 오늘의 작업을 내일로 이어가려는 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짐짓 아는 체하며 떠들었으나, 나 또한 갈팡질팡 허우적대는 한 명의 작업자일 뿐.

 

 

노순택 /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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